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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57세의 나이로 조선 1대 임금이 되다.

by bonni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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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ikimedia] 조선 최고령의 나이로 즉위한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와 그의 개국공신 파트너 정도전이 그린 조선의 모습, 그리고 이성계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란 의미를 가진 조선

이성계가 조선 1대 임금이 되면서 고려는 조선으로 이름이 바뀌고 수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멸망시킨 국가의 수도에서 지내긴 여간 불편했을 것이다. 개경은 오랫동안 고려왕조의 터전이었기에 여전히 이성계를 반대하는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미 개경은 집터의 운이 쇠한 상태였기에 개경이 아닌 새로운 도읍지를 논의했고, 이 중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으로 결정하게 된다.

한양은 한강과 가까이 있는 곳으로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안으로는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로 최고의 명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산, 즉 풍수지리설에서 중심이 되는 산을 선정하는 논의가 이어지는데 매우 열띠었다. 그중 정도전과 하륜의 논의가 매우 팽팽했는데, 정도전은 전통 유교방식으로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오늘날 경복궁 자리에 궁궐을 놓아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러자 하륜은 그의 주장대로라면 도읍과 관악산이 마주 보게 되는데, 그럼 관악산의 강한 화기로 인해 국가의 큰 재앙이 있을 거로 보인다며 강하게 반대했고, 경복궁의 서쪽 지역인 무악 부근에 궁궐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경복궁 자리이다. 경복궁이라는 이름 역시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경복이란 복을 누리소서라는 뜻으로 시경의 주아편에 나오는 문구에서 이름을 빌렸다고 한다. 그리고 경복궁의 정전은 임금이 항상 근면하시라는 의미로 근정전으로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에 대해 조금 설명하고 넘어가면, 그는 이성계의 지지세력으로 개국공신의 파트너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성계 뒤에서 조선건국에 힘쓴 인물로 둘 사이는 단순한 정치적 조력자 이상의 돈독한 관계였다. 그는 이성계의 무한한 신뢰로 여러 개혁 정치를 단행하게 되고, 조선의 모든 구상과 정비를 도맡게 된다. 그렇게 그는 신권중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정도전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왕조체제에서 오는 폐단이었다. 왕조라는 것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가 이어지는데 이때 성군이 나올 수도 있고, 폭군이 나올 수도 있다. 성군이 나온다면 괜찮지만 만약 폭군이 나온다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매뉴얼을 만들게 된다.

이전의 왕들은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활이 가능했다. 술을 마시고, 놀며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했지만 조선시대의 왕들은 불가능했다. 바로 정도전이 강화한 시스템, 경연제도 때문이다. 경연이란 왕이 신하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정치를 의논하는 것인데, 사실상 왕을 공부시키기 위함이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2시간씩 하루에 총 6시간을 공부했고, 문안인사 이후 개인 시간에도 일을 했다. 관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래로는 선비부터 위로는 재상까지 그들의 상소문을 받아 읽게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왕들을 혹독하게 교육하고 키워 성군으로 만들려는 것이 신권중심의 세상을 바라는 정도전의 전략인 셈이다.

조선 최고령의 나이로 임금이 된, 태조 이성계

이성계는 1335년 생이고 조선건국한 해는 1392년이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무려 57세이다. 그 당시 왕의 평균 수명은 고작 40대였다. 대개 빠르면 10대 전후, 늦으면 30대에 즉위해 40대에 승하하였다. 이성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령의 나이로 즉위한 임금인 것이다. 그렇기에 건국 직후부터 후계자 문제는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에게는 2명의 부인과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이고 이방우,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연 이렇게 6명의 아들을 뒀다. 둘째 부인은 신덕왕후 강 씨이고 이방번, 이방석 2명의 아들이 있다. 한 씨는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녀를 대신해 부인 역할을 한 것은 둘째 부인 강 씨이다.

원칙대로라면 한 씨의 첫째 아들인 이방우가 왕세자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정작 그는 왕세자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이방우는 위화도 회군 때부터 아버지 이성계와 뜻이 달랐고, 반란을 반대했으며 고려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결국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슬픔에 빠져 은거하며 매일 밤 술로 날을 지새웠고, 결국 조선건국 1년 후 1393년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다른 왕자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했는데 당시 왕조 건국에 대한 공을 따지면 차기 임금은 이방원이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태조의 선택은 막내아들인 이방석이었다.

 

이때 이방석의 나이는 고작 11세의 소년이었는데 조선 최초의 왕세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를 몹시 아꼈기 때문이다. 강 씨는 태조에게 신의왕후 한 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닌 자신의 아들을 세자책봉해 달라 말했고, 신하들도 한 씨의 아들 중 세자를 뽑아야 한다면 성격이 포악한 이방번이 아닌 막내아들인 이방석이 합당하다 입을 모았다. 그렇게 막내아들인 이방석이 7명의 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것이다.

정도전 역시도 이방석을 지지했다. 정도전이 편찬한 조선경국전을 보면 국가가 왕의 자질을 변화시킬 힘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나온다. 이러한 생각은 왕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방원에게 반감을 주었고, 그렇기에 신권을 생각하는 정도전은 더욱 이방석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이방원은 막냇동생에게 왕위 계승 자리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방원 역시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하지만 새 왕조를 세운 후 거의 푸대접을 받으며 불만을 품게 되고, 결국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그 명분은 정도전이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이방원은 정도전과 이복형제인 이방번, 이방석을 죽이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끼던 신하와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좌절하였고, 이방원은 민심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여 둘째 형인 이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이다.

태조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상왕으로 물러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많은 것을 이룬 이성계지만 그의 말년에는 쉬이 죽지 못하고 쓸쓸해한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넷째 아들 이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자식들의 싸움을 지켜봐야 했고, 그가 아끼던 부인 신덕왕후 강 씨는 먼저 세상을 떠나 그녀를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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