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나무위키] 태종 이방원, 비록 양손에 피를 묻혀 오른 왕의 자리이지만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브레인이었던 그. 재위 18년 동안 이룬 그의 업적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27명의 왕들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138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다음 해에 문과 병과 7등으로 급제한 브레인 중의 브레인이다. 문과 시험은 총 3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1차인 초시, 2차인 복시, 3차인 전시를 통과해야 한다. 전시는 최종시험으로 임금 앞에서 보게 되는데, 임금이 낸 문제에 답을 적으면 된다. 이렇게 통과한 33명은 관리로 확정된 사람들이다. 이 안에서도 등급이 매겨지는데 1~3등은 갑과, 4~10등은 을과, 11~33등은 병과가 된다. 여기서 갑과 1등을 한 사람을 장원급제자라 하고, 이방원이 병과 7등을 한 것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했다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그는 힘만 쓸 줄 아는 게 아니라 두뇌까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과거제도는 고려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때는 가문의 권세에 힘입어 채용되는 제도도 같이 있었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바뀌게 된 배경에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있다. 이성계는 함경도 지방민 출신이고, 정도전은 서얼의 자손으로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신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게 능력 위주의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즉, 조선시대에는 출세하기 위해선 누구라도 공평하게 과거시험을 봐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방원은 이성계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는데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가 아끼던 신하와 아들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죽도록 미워하게 되고 그가 왕위에 오른 모습조차 보기 싫어 함흥으로 돌아가 버린다. 하지만 그 화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태조는 신덕왕후 강 씨의 친척인 조사의가 일으킨 난에 가담하여 아들 이방원을 몰아내려 했다. 이 일로 태종은 입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여론마저 뒤숭숭하게 된다.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이성계는 이방원의 눈치를 보며 여생을 보냈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이방원은 오히려 지극정성으로 효도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아버지를 추어올리면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뀔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재위기간 18년 동안 그가 이룬 업적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애쓴 왕이다. 조선은 정도전에 의해 신권 중심 국가로 시작하였는데, 이방원은 이런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조선은 엄연히 이 씨 왕조 국가이며, 왕권이 강력해야 백성들의 삶도 안정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한다. 6조는 오늘날의 장관직과 같은 게 6개 있다는 뜻인데, 원래대로라면 왕과 6조 사이에 의정부가 있다. 의정부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오늘날의 국무총리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왕-의정부-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관계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6조에게 명령하고 보고받겠다는 것이다. 즉, 6조 직계제를 시행됨으로써 행정업무에 대한 왕의 권한은 강해지고 의정부의 역할은 축소된 것이다. 당연히 의정부 신하들은 불만을 가졌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은 가족까지 죽이며 왕위에 오른 자이기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신하들은 그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방원은 사병을 없애버린다. 그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제2차 왕자의 난을 막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본인이 왕위에 오른 후 다른 사람이 사병을 쥐고 있으면 반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왕위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을 한 사람은 아내, 원경왕후 민 씨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미리 숨겨둔 무기를 남편에게 건네며 이방원이 일인자가 될 수 있게 조력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조강지처를 배신하고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원경왕후 민 씨는 큰 배신감을 느꼈고, 결국 화병과 우울증으로 자리에 드러눕게 된다. 태종은 부인의 시기 질투가 몹시 괴로웠지만 차마 호통을 치진 못했다. 대신 부인의 남매인 민무구, 민무질을 괴롭혔다. 그들은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이방원이 왕이 되는데 도운 1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신생 국가인 조선에서는 왕권 강화가 필수인데 외척의 힘이 강해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왕이 된 후 그들을 멀리했다. 결국 민무구와 민무질을 제주도로 보냈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며 외척을 탄압했다. 물론, 그 당시 민무구 형제가 세자 양녕대군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낌새를 태종이 눈치채고 견제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지만, 부인의 시기 질투에 대한 반발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종의 외척 탄압은 부인의 남동생뿐만 아니라 며느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자질이 문제 되면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당시 세종의 장인어른이었던 심온의 기세가 매우 등등했고, 이를 본 태종은 사돈까지 죽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병 혁파와 외척 탄압을 한 태종의 모습은 마냥 폭군이다. 그런데 사간원을 독립시킨 후, 태종의 행동은 그를 조금이나마 달라 보이게 했다. 사간원의 독립은 언관 제도를 따로 분리하는 걸 말한다. 언관은 임금님께 바른말을 고하는 사람인데, 그들은 왕과 신하들의 잘잘못을 비판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태종은 고려의 핵심 기구인 문하부를 없애고, 사간원을 따로 독립시켜 버린다. 그렇게 말 많고 피곤한 사간원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만 그들은 태종이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관리들의 비행만 고한 것이 아니라 이방원의 잘못도 함께 고한 것이다. 지금까지 절대권력자인 태종에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직언한 사간원의 말을 듣고 태종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웬만하면 들어주었고 그게 아니면 유배를 보낸 후 다시 복직시켰다. 이를 본 관원들은 용기를 내어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태종은 이들을 주변에 포진시켰다. 이러한 이방원의 행동은 리더의 주변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용기 있게 옳은 말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그 나라와 사회, 조직이 바로 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발적으로 왕위에서 내려온 유일한 왕
태종에겐 4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는 양녕대군, 둘째는 효령대군, 셋째는 충녕대군, 넷째는 성녕대군이다. 조선은 유교 사회이기에 왕실이건 사대부 가문이건 적장자를 우대했다. 여기서 적장자란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째 아들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로 나머지 여자들은 첩이라 불렀고, 그렇게 처와 첩의 구분을 엄격히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에 대한 차별도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적장자였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장남인 양녕대군은 태종을 이어 왕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세자가 됐다.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었기에 자식들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우애를 가장 강조했고, 둘째와 셋째에게 권력 대신 자유를 주게 된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효령은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데, 유교국가에서 그의 행동은 세자로서의 자격과는 멀어진다는 뜻을 갖고 있다. 충녕은 공부에 빠지면서 방대한 양의 책을 읽었는데, 특이하게 한 권을 무려 100번씩 반복해서 봤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책은 100번을 더해 200번씩 읽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서인지 교양이나 문화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다. 이렇게 동생들은 각자만의 방식대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는데 문제는 세자였다. 양녕은 시간이 지날수록 빗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9세에 원자로 책봉되었고, 2년 뒤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일찍이 후계자로 지목됐지만 그의 탈선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 시작은 아마 아버지가 외삼촌들을 죽이면서였을 것이다. 양녕은 어린 시절을 민무구와 민무질의 집, 즉 외삼촌의 집에서 보냈다. 그렇게 자신을 길러준 외삼촌들을 친아버지가 죽였으니, 그 충격은 무척 컸을 것이다. 그렇게 양녕의 비행은 끊이질 않았고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결국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 양녕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충녕이야말로 왕이 될 재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충녕은 세자가 됐고, 태종의 확고한 뜻으로 세자가 된 지 2개월 만에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로써 22세의 나이에 왕이 된 제4대 왕, 그가 세종이다. 태종은 27명의 임금 중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양위했고, 상왕으로 4년을 머물면서 국가의 중요한 문제에 참여하여 함께 논의했다. 조선 최고의 카리스마를 가진 왕, 태종. 그는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겸허히 물러난 사람으로, 오늘날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라 볼 수 있다.
댓글